1. 레고무비 + 주먹왕 랄프
최근 본 영화. 키덜트로서 행복한 경험이다. 어릴적 나의 자유의지가 그저 창조주의 역할놀이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러시아의 클럽인가 어디에는 안에선 밖이 보이지 않는 거울 공간에 미녀가 들어가 하루를 보내고 사람이 구경한다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이 세계가 거대한 어항과 같다면. 이번에 본 영화들은 그런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카르페디엠, 요즘 스타일로 욜로!로 새기게 해주었다.
최근에 뉴트로 열풍이 부는데, 기술이 발달될수록 이 흐름이 지속될 거라 본다. 문화자본도 점점 구매력이 있는 중장년으로 옮아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라 어린 친구들은 오히려 재미가 덜하지 않을까 싶다. 내 경우엔 어릴적 레고를 많이 갖고 놀기도 했고, 오락실도 다니고 팩게임은 물론 디즈니만화도 좋아했어서 두 영화 모두 낯설지 않았지만.
우주를 아는 것보다 바다에 대해서 세포 등 작은 입자에 대해서 더 모른다고 하던데, 이런 미시세계가 상상을 발휘하기 좋은 소재인 것 같다. 요즘 콘텐츠는 '세계관' 싸움이라 목표가 분명하고 캐릭터가 확실한 게임이 특히 활용되기 좋은 것 같다. 게다가 보기만 해도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놀이 속으로 타임리프할 수 있으니. 롤플레잉 게임인 심즈의 경우 최근 1인칭 시점 카메라가 생겼는데 심즈 게임으로도 영화 한 편 나올 거 같다. 엄청난 수작업이겠지만 한번 만들어볼까 싶기도.ㅋㅋ
2.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구조와 체제에 대한 책을 연달아 읽고 있다. 다 읽긴 하였으나 아직 정리가 부족해 맘 잡고 리뷰를 남기긴 해야겠다. 일단은 간단히 느낌만 적는다.
<시간이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는 류동민 교수의 글로 마르크스 <자본론>을 기준 삼아 현대사회의 노동 시간이 어째서 불합리한지 경제학적으로 설명한다. 노동의 의미가 단순히 임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며 노동을 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또 그 후에 소진되는 시간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한 지점이 좋았다. 종국에는 기본소득이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창업을 해야겠다 싶어진다.(ㅠㅠㅠㅋㅋㅋ)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는 <유한계급론>으로 유명한 베블런의 책으로 우리나라에 번역된 지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다. 4차혁명에 대한 글을 많이 쓰는 '홍기빈' 씨의 번역이다. 일단 번역이 좋다. 이해도 잘되고. 경제 대공황이 오기 전에 베블런은 죽었는데,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불평등을 낳을지 예견한 점이 놀라웠다. 자본가가 무형자산을 점유할 때의 해악은 현재의 공유경제 논란에도 접목되어서 배운 바가 많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2013년에 한 번 읽고 거의 5년 만에 다시 읽었다. 재밌는 차이는 당시엔 내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현재는 불가지론자란 것이다(니버는 기독교인, 종교적이진 않지만 종교에 대해 딥한 고찰을 담고 있다). 밑줄 치는 부분이 아주 다른 게 신기했다. 추억 여행이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은 굉장히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니버가 글을 좀 어렵게 쓰는 거 같고 번역도 아주 거지같기 때문이다. 안은문장, 이중부정이 많다. 종교, 정치, 계급, 혁명 등 사회제도의 여러 부분을 총망라해 왜 개인의 도덕심이 공동체로서 윤리적으로 발휘되기 어려운지 어떤 한계가 있는지 밝혀 규모 자체가 크기도 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매개하는 언론인이 되고 싶은 입장에서 인사이트가 많은 책이었다.
다음은 인상적인 구절 몇 가지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궁극적으로 이성은 개인의 내면적 질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도 기여할 수 있다. ... 비합리적인 사회가 불의를 용인하는 이유는, 그 사회가 권력층과 특권층에 의해 만들어진 가식과 겉치레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이성은 더 나아가서 권력층의 특권과 권력이 없는 층의 비참함 사이의 관계를 폭로함으로써 공동체 내에서의 특권층의 사회적 위신을 타파한다.
노예 제도와 같은 사회 제도를 인간의 죄악의 결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이 죄를 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볼 것인지에 관해 종종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하여튼 교회는 기존의 제도와 그 자신의 이상 사이에 간격과 충돌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제도를 수용한다. ... 자연과 역사에 존재하는 그 어느 것도 하느님의 분명한 의지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자연적 결정론과 그 신앙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부추겼다.
실제적으로 정치적 이슈들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는 지극히 미미한 것이어서, 국민의 행동 통일은 기껏해야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지배 집단의 이기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이고, 때때로 전국을 휘몰아치는 대중의 맹목적 감정과 열병에 의해 성취될 수 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해서 국가는 합리적인 정신과 지성보다는 폭력과 감정에 의해 유지되는 결사체라 할 수 있다. 합리적인 자기 극복의 정신 없이는 자기 비판이 있을 수 없고, 또한 이러한 엄정한 자기 비판 없이는 윤리적 행위가 있을 수 없음을 감안해볼 때, 국가의 태도가 윤리적 성격을 갖기 어렵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당대의 최신 산업 기술로 공동체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는 과정 속에서 강한 무력을 갖춘 개인이 나타나 그 과정에 필수적인 비교적 희소한 물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게 되며, 이를 통해 수단과 방법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지식의 활용을 독점 혹은 ‘매점’해버리는 일이 가치 있는-다시 말해서 해볼 만한-것이 된다. 공간적 조건이나 각종 수량화로 인해 이러한 새로운 기술적 조건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는 재화 조달의 수단과 방법에 대한 공동체 전체의 지식을 실행에 옮기려면 당대의 최신 산업 기술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물질적 장비를 사용하는 길밖에 없다.
소유의 몫이 적은 이들 혹은 물질적 재화만을 소유한 이들의 재산은 소유의 몫이 더 많고 특히 비물질적 재화를 소유한 이들의 관리 아래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여러 물질적 산업 과정들은 관심의 중심이 그 비물질적 자산의 가치를 노이는 데에 있는 이들의 통제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공동체에 전체 차원에서의 화폐의 사용을 지도해나갈 힘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다. 비상한 크기의 거대한 부를 가지게 되면 그것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바이거니와, 그것 특유의 영리 활동의 기능이 이렇게 현실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그 정도에 비례하여 구식의 자본가-고용주는 그 스스로의 재량에 의해 사업을 이끌어나갈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공동체 전체에서 수입을 거두어들여 그 금전적 거물에게 전달해주는 수탈과 이전의 도구, 즉 단순한 중개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시간은 어떻게 돈이 되었는가?>
복잡 노동의 교육 양성 비용이 자유 시장에서의 가족 단위 경쟁이면 오히려 특정 직종의 계층화가 되어 버린다. 공적 부담으로 교육 훈련이 이루어지면, 복잡 노동이 높은 보수를 받을 필연성이 옅어지고 사회의 유동성, 경제민주주의의 기초가 확립된다.
노동자가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을 ‘필요노동’이라 부르고, 그것을 초과하는 노동을 ‘잉여노동’이라 부른다. 지배노동량이 투하노동량보다 크다는 것은 잉여노동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회 전체의 노동시간 총량을 하나의 커다란 창고에 쌓아 둔다면, 노동자가 거기에 갖다 넣은 자신의 노동시간은 그곳에서 아메리카노라는 상품의 형태로 찾아가는 노동시간에 비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리자가 오너의 말 한마디에 일자리를 잃고 오너의 생각에 맞춰 영혼을 버려야 하는 시스템이라면, 관리자는 그저 잉여노동의 일부를 떡고물로 나눠 먹는 상층부 노동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나쁜 개인이 사라져도 나쁜 구조는 살아남아 여전히 현실을 지배하는 것처럼, 관리자 계급이 관리 시스템, 그 구조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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