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고물상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세월의 더께를 덮어쓰고 어딘가 부러져 모인 물건들을 보면 애처로움이 들기도 한다. 손때 묻은 구식 가전 제품과 해묵은 참고서 사이에서 득템한 적도 있다. 바로 나의 반려묘 ‘달이’와 ‘밤이’. 달밤에 나갔다 고물상에서 들려오는 애옹애옹 소리에 집사가 되어버렸다. 고장난 물건이 죽어가는 곳에서 생명을 건져내리라곤 상상을 못했었다. 누군가에게 고양이는 처분해도 될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쁜 냥이를 얻은 대신 키덜트이자 맥시멀리스트였던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다. 내 방엔 한 캐릭터의 피규어가 50개 정도, 인형도 50개 정도로 책장 선반, 무언가 올려놓을 공간이라면 물건들로 가득하다. 활달한 캣초딩들은 달밤이 되면 산꼭대기에서 목놓아 우는 늑대처럼 높은 곳으로 피신시킨 피규어들을 발로 톡톡 건드려 떨어뜨리곤 했다. 정말 신기한 건 냥집사가 된 이후로 20년 넘는 덕후 인생 동안 애지중지한 그 녀석들이 단순한 물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역시 고양이는 위대했다.
때마침, 이사를 하게 되어 이참에 미니멀리스트가 되어보고자 온갖 잡동사니를 끌어냈다. 오래된 편지, 늘어지게 듣던 테이프들과 사놓고 읽지 않은 장서들과 용도를 잃어버린 구식 케이블들이 쏟아져나왔다. 다 갖다 버릴 심산이었는데, 물건 하나하나에 추억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별 헤는 밤>의 윤동주처럼 물건 하나에 십 몇 년 만에 떠올리는 어릴적 친구들의 이름이, 그리움이 살아났다. 고양이 털만 수북히 쌓여가는 처치 곤란의 물건들을 그날 하나도 버리지 멋했다. 먼지를 쓸어내리는 순간, 미화된 과거로 도킹하는 그 무중력의 시간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사물이 주는 존재감은 가볍지 않다. 미니멀리즘 열풍이 불고 공유 플랫폼이 뜨지만 그래도 여전히 쓸모 없는 것들을 간직하고 싶다. 과소비를 지양하고 공유로 효율을 지향하는 건 옳다.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마음에 편안함을 깃들게 한다는 미니멀리즘 운동의 취지에 공감한다. 그러나 물건으로 인해 먼 데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고 기계성의 현대 사회 속에 느긋한 정취와 인간적 정서를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것 또한 좋지 아니한가.
디테일을 최대로 키워가는 3d시대에 실감형, 체험형 팝업스토어가 뜨고, 필기감을 살리는 방향으로 태블릿 PC가 계량화되는 건 모두 결국 사람 냄새 나는 아날로그 정서에 대한 이끌림 탓이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 했던가. 미감이 훌륭한 피규어를 모으다 코숏 고양이에 마음을 뺏긴 후, 물건에 집착하지 않게 됐다. 다만, 채우고 비우고를 반복하며 만족감을 주는 것에 대한 선별, 호오가 예리해졌다.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을 쓰며 오늘 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고 했던가. 나는 오늘 밤에도 버릴 물건을 헤아리며 냥털을 치워낸다. 그리고, 물건 하나하나에 시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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