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 발표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죽이고 있는 오전, 오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우리집에 남편이랑 아기랑 오겠단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거절할 이유도 명분도 없어 만났다. 대략 친구는 1년 만, 친구의 남편은 4년 만에 만나는 거였지만 어제 본듯 반갑고 할 얘기가 넘쳤다. 시골 동네라 괜히 먼 걸음한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도시에 사는 부부는 오히려 목가적인 풍경을 좋아해서 다행이었다.
이제 그 친구를 안 지 13년, 친구의 남편을 안 지는 거의 10년쯤 됐다. 연애 상담을 청해오던 그들이 어느새 부부가 되고 엄마아빠가 되어 분주한 모습을 보니 괜히 흐뭇했다. 예전에는 결혼한 친구들을 보면 나 혼자 어린아이인 것 같아 괜한 자기반성이 있었는데, 그들 모습 그대로 또 나는 나대로 편안했다.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줄여가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익숙해졌고, 어느새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외롭지 않게 되었던 터였다. 체념을 지나 달관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가고 외부의 시선에 초연해지면서 내가 가진 것, 내 바운더리 안에서 평안을 느껴왔다. 그래서 오늘 몇 년 만의 그 만남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오랜 친구'라는 건 정말 희한한 관계다. 암묵적인 '정'이란 대가로 호혜적 우정을 유지하는 임시계약적 관계라고 예전에 어떤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임시계약이라기보다 구두계약에 가까운 것 같다. 구태여 되새기거나 낙인찍어 규정하지 않지만 익숙하고 당연한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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