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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정약용 덕후의 책으로 정약용 입덕하기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 박석무 / 한길사>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 박석무 / 한길사


1.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나절 내내 읽었는데도 다산에 대해서 아직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집, 잡문부터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유명한 저작까지 생전 남긴 책만 500권에 이르니 그 사상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정약용은 당대의 진실한 목격자로서 짧은 대목이라도 읽고 되새길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 ‘조선의 역사를 알려면 다산을 알아야 한다’는 위당 정인보와 저자 박석무 씨의 말마따나 조선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시대상을 즐겁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한자가 가득하지만 의외로 재밌고 술술 읽혀 일단은 추천하는 바이다. 저자 박석무 님께서 대단한 정약용 덕후셔서  함께 덕질여행을 하는 기분도 든다.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이라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많이들 보겠지만, 문화유산답사기를 읽어내려갈 때의 기분처럼 여러 공간과 시간 속 다산을 만나보고 싶다면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유배지...>는 읽다 말았고 어쩐지 훈계하는 조라 동트기 전 일어나라,, 이런 훈화말씀?만 기억나는 반면, 이 책은 정약용 개인의 삶과 역사의 기록들이 재미를 더해줘 신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2.

역사적 인물은 그 인간관계도 항상 빛나는 것 같다. 그사세라고 할까. 정약용이 성호 이익의 덕후였다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고, 천주교를 들여온 이승훈이 매형이라는 것도 몰랐던 사실이다. 게다가 왠지 무서운 초상과 지국총지국총 어사와로 유명한 윤두서 님이 친척이라는 것도! (윤두서가 외증조부다.)


뭐 이런 여러 관계 중 뭐니뭐니 해도 제일은 ‘정조’다. 정조와 정약용의 그 끈끈한 관계는 브로맨스를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할 만큼 대단하다. 특히 이 대목에서 이건 드라마로 만들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자백선>을 받았는가?”

“받았습니다.”

“<대전통편>을 받았는가?”

“예, 받았습니다.”

“<국조보감>을 받았는가?”

“예,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근래에 나라에서 발간한 책은 모두 받았으니 이제는 줄 것이 없구나.”

정조는 그러면 술이나 마시라고 권하고는 승지를 시켜 다른 책을 또 내려주었는데 뒤에 보니 <병학통>이라는 병법에 관한 책이었다.


정약용의 삶은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읽었던 것, 약종, 약전 형제와 토론하던 일, 암행어사 등 여러 관직을 거친 일, 정조의 총애를 받고 여러 업적을 남긴 일, 신유박해 때 형제를 읽고 문초를 받은 일, 시와 풍류를 읊던 <죽란시사> 등의 모임, 자식을 잃고 아내와 떨어져 살아간 귀양살이, 말년에 후학을 양성한 일까지 이야기로 풀어갈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KBS에서 대하드라마로 다산 정약용을 만든다면 본방사수할 용의가 있는데... (혹시 이미 있는 건 아니겠지...)


3. 

다산이 관직을 하면서, 귀양살이로 여기저기 다니며 읊은 한시들도 감명이 깊었는데, 한글로 쓰여진 글이 아니라 아쉽다. 그래도 저자 박석무 님께서 옮겨주신 인상깊은 기록을 하나만 옮겨본다.


슬프고 애처로운 하담의 나무들이여

봄바람에 절로 꽃이 피었구나.

땅은 외져도 길은 나 있어

발길이 닿으니 집에 온 듯하여라.

전에는 죽마 타고 놀던 이곳에

남포 입은 오늘은 화려하다네.

묘 둘레 방황하나 누가 나 반겨주리

우뚝 서서 눈물만 흘리네.

-<하담에 도착해서>


부모님에 대한 다산의 그리운 심정이 잘 드러난다. 어쩌면 그가 남긴 글 중에 가장 개인적이고 소소한 글일지 모르겠는데, 어쩐지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아마, 아직 남포도 못 입었지만 언젠가 내가 취업을 해도 돌아가신 아빠에게 저런 맘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것 같다.


4. 

다산이 남긴 농정에 대한 혜안은 지금도 배울 점이 많다. 그만큼 아직도 우리나라가 농업을 천시하고, 또 아직도 ‘삼정의 문란’은 아니지만 부조리가 많기 때문이겠다. 수탈 당하는 농민들을 보고 지은 <애절양>이나 <장기 농가> <적성촌에서>와 같은 글은 정말 몇 세기를 넘어선 내가 다 마음이 아플 지경이었다. 


다산은 농업의 세 가지 문제를 지적하며 편농, 후농, 상농을 말했는데 가장 공감된 것은 상농에 관한 부분이었다. 아래 옮겨와본다.


농민들의 지위를 상승시켜야 농업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농민은 무조건 천하고, 농민의 지위가 천민과 같은 정도라면 누가 농사를 짓고 농업을 경영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따라서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또한 아무나 과거에 응시하느라 농사를 짓지 않으며 선비라는 이름을 팔면서 농부를 천시하기 때문에 농민의 지위가 낮아진다고 했다. 각 고을마다 일정 정도의 과거 응시자를 정해 그 이상의 사람들이 과거를 보러 가는 폐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응지론농정소> 


5. 

마지막으로 다산의 실학 사상에 대해서도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어 좋았다. 박석무 씨가 풀어주신 몇 대목을 옮긴다.


주자는 인이란 “사랑의 이치요, 마음의 덕”이라고 했지만, 다산은 인이란 글자 모양대로 사람이 둘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해 섬겨주는 행위로 해석하여 행동이 배제된 경학의 해석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늘과 인을 이로 해석하는 주자학에 맞서 정면으로 다른 해석을 시도했다. 다산은 중용의 용도 주자의 평상과는 달리 항구라고 해석해 힘써 행하는 인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만 하면 그게 바로 성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인간이 힘써 노력하면 인을 행할 수 있고 지속하면 성인까지 될 수 있다는 가능의 철학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착한 인간의 본성만 제대로 지키면 만 가지 일이 모두 해결된다는 주자의 성리학적 사고에서부터, 아무리 훌륭한 성품이나 덕성을 갖추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으며 선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덕이 될 수 있다는 ‘성+행=덕’이라는 새로운 사유체계가 다산을 통해 실학사상의 본질로 자리잡아갔다. 다산초당에서 연구한 다산의 경학관계 저서 232권을 관통하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다음과 같이 점잖은 표현을 사용했다.


인의예지라는 것도 행동과 일로 실천한 뒤에야 비로소 본뜻을 찾을 수 있으며, 측은이나 수오하는 마음도 안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를 말하는 사람은 인의예지를 각각 낱개로 떼어놓고 이것들이 마음 속에 가무어져 있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측은이나 수오의 근본일 뿐이니, 이것을 인의예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