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만 보고 책을 고를 때가 있다. 이 책도 그랬다. 최근 사회과학, 인문학서만 많이 읽다 보니 소설이 고팠다. 지만지에서 나온 조지 오웰의 <엽란을 날려라>를 재밌게 봤던 기억에 출판사만 보고 골라든 책 <거미줄>.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독일 문학. 전공도 관련된 데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이고 영화를 많이 접해 조금 아쉬움이 드려는 찰나, 홀로코스트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려나 싶었는데, 프로이센 말부터 1차세계대전 즈음까지만 가는 내용 같았다. 일단 시기상으로 흥미로웠다. 이런 '뜬' 시기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얼마 전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영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라스트킹덤>도 굉장히 재밌게 봤던 터. 기대감을 갖고 읽어나갔는데, 역시나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은 독일 사회에서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생겨났고, 나치가 어떻게 세력을 이어갔는지, 소시민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아니 어쩌면 작은 히틀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인공 테오도어는 적당히 세속적인 인물이다. 가난하고, 흠모하는 여인이 있다.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는 엄청난 악당도 아니고 어쩌면 시류를 따라 적당히 욕심을 내고 기회를 잡으며 유명해져간다. 그리고 무감각하게, 아니 사실 죄책감을 회피하면서 악을 저지른다. 심리묘사가 놀라울 정도로 담담한데, 또 굉장히 설득적이다. 진짜 그 시대의 젊은 나치가 이랬겠구나 싶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는 반히틀러적인 활동을 했다. 저자인 요제프 로트는 유대인으로서 여러 핍박을 받기도 했는데, 유대인의 이중성마저 그려낸 점이 인상 깊었다.
숨어 있어서는 안 된다. 숨겨져 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벽에 끼여 있는 보잘것없는 벽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끝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남의 말을 엿듣거나 사람들이 일화를 얘기하고 음담패설을 할 때 웃기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헛된 희망을 가슴에 품고 외롭게 다수 속에 묻히는 존재가 돼서는 안 된다. 무시당하고 고통을 견뎌야 하고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잘 들어 주었다고 사랑받는, 그런 사람의 영원한 좌절감을 맛보아서는 안 된다. 아, 사람들은 격의 없고 위험하지 않은 자라고 나에 대해 생각하겠지?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곧 불명예스러운 이 구석에서 빠져나오게 될 것이다, 승리자가 되어, 시대에 구속되지 않고, 일상의 멍에에 짓눌림 없이. p.7
테오도어는 자신이 가정교사로 일하는 집의 여인을 사랑한다. 이 사랑은 그가 명예를 잃고 난 후 금방 식는 걸 보아 낭만적이진 않다. 탐닉 내지는 욕망에 가깝다. 그녀를 갖고자 하는 마음은 성공하겠다는 욕심에 닿고, 퇴역한 소위로서 그가 성공하는 길은 밀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밀정으로서의 그의 삶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우연히 당한 겁탈을 그는 성공의 동아줄로 삼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나간다. 밀정으로서 사람을 이용하고 또 가차없이 버린다. 이 모든 과정은 약간의 긴장감만 있고, 마침내 해치우고 난 후엔 아무런 죄의식이 남지 않는다.
단지 새롭다는 이유로 흘러가는 순간들이 두려웠고 다가올 일들에 대해 공포를 느꼈던 테오도어, 머물러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대담하게도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스스로를 기만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모험을 기대했다. 그는 무장되어 있었다. p. 50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많이 생각하게 된 건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기록한 그것이다. 유대인은 처음부터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설에선 1923년 노동자들의 시위로 대혼란의 빠진 베를린이 어떻게 유대인에게 총구를 겨누는지 보여준다. 오랫동안 쌓여온 아리아인의 유대인 혐오가 분명 깔려 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박해는 시작된다. 테오도어는 광기와 혼란의 한가운데에 휩쓸린다. 그에게 고뇌와 좌절을 찾아보기 어렵다. 광기인지 알아차리기 어려운 일종의 무감각만이 남아 있다.
그가 도끼를 집어 들고 두 손을 모아 팔을 뻗는 것을 보고 호흡을 멈추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옆에 귄터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누운 채 반쯤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반밖에 지르지 못한 비명이 목구멍 속에 꽂혀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지르지 못한 죽음의 비명을 숲이 조용히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p. 63
그는 개머리판으로 시체들을 내리쳤다. 무기를 내동댕이치자 시체의 두개골이 부서졌다. 끝이 아니었다. 그는 부상당한 사람들의 얼굴과 배를 그리고 힘없이 매달려 있는 손들을 군화의 굽으로 밟았다. 죽은 자들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다. 그들은 죽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160
'악성'이 의외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지극히 가벼운 동기로 자행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이는 '악'이 대단치 않은 너도 저지르고 나도 저지를 수 있는, '그냥 원래 살다 보면 그런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악'이라는 건 교묘하게 합리화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큰 재앙을 초래하기도 하니, 항상 경계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악' 자체를 극화하지 않되, 책임을 지우는 세심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다. 장르가 아닌 성찰의 도구로 콘텐츠를 곱씹을 때, 악역이 없는, 혹은 모두가 악한 내용이 좋은 이유다.
최근 유행하는 <스카이캐슬>만 봐도 그렇다. 모두가 저마다의 '악'을 가지고 있다. 네티즌의 반응을 보면 이입하는 대상, 혐오하는 대상, 응원하는 대상이 다 다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인물들의 악함이 긍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의 작은 악함이 모여 대한민국 입시 잔혹사, '스카이캐슬'이라는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굉장히 캐릭터와 서사를 잘 직조한 드라마라고 본다.
반면, 밑도 끝도 없이 '악'을 극화하는 막장 드라마는 장르로 소비돼 '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낳는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게임 캐릭터처럼 온갖 악행을 향해 직진하는 캐릭터에 분노하면서도 굳이 채널을 고정하는 이유는? 얼마전 엔터미디어의 <하나뿐인 내편> 평론에서 사람들은 그저 악인에 화내고 선인이 성공하는 단순한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며 감정을 토해내길 원한다는 맥락의 비평을 봤는데 십분 공감이 간다. 우리는 어쩌면 반박불가의 '악'을 상정하고 그순간 혹은 과거의, 미래의 자신과 주변의 악을 망각하고, 악한 사회 구조의 혐의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닐까.
'악'의 어원은 본디 '흠'이라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의 '악'은 여자의 생리혈이기도 했다. 월경을 겪는 여자는 격리되곤 했는데 부족 사회에 세균이 전염될까 봐 그랬다고 한다. 공동생활이 중요한 사회에서 악은 그토록 일상적이면서 '스펙타클해 보이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흠들도 때론 '악'으로 발현한다. 정치사회경제 문제의 갈등, 부조리 또한 그렇고 인터넷 공간이 그렇다. 악플러는 어디에도 없다. 혹은 우리 모두다. 마녀사냥하는 가십을 소비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의 아이히만의 악행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악을 긍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악을 극화하는 것도 위험하다. 이때 일상의 악은 은폐된다. 우리 모두가 시대 부조리의 공동정범이라는 인식, 그 안에서 성찰과 반성을 해나가는 게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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