念頭

잠 못 드는 이야기

텅빈풍경 2019. 3. 11. 22:25


내 올빼미 생활은 상가건물 2층에 살았던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됐다. 우리집 앞엔 버스정류장이 있었는데 내 방 창가로 밤늦게까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넘어와 잠 못 드는 날이 많았다. 연인들의 낯부끄러운 밀어와 사랑싸움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였고, 버스를 기다리는 이들의 대화와 통화소리는 라디오사연처럼 편안한 연속극이었다. 밤마다 막차를 놓친 이들의 애달픈 소리도 들었는데 누군가에겐 절박한 일이었지만 내겐 잘 준비를 하라는 취침 알람이었다. 시험기간에는 밤의 노동을 백색소음 삼아 밤샘을 하기도 했다. 거리에 인적이 끊기면 찾아오는 미화원의 비질은 MC스퀘어 부럽지 않게 균일했다. 더운 날에도 궂은 날에도 청소부의 성실한 움직임은 동일한 소리로 공명했다. 그무렵 누군가에겐 밤이 낮보다 더 길고 치열하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들의 밤은 내게 보이지 않는 익숙한 소리일 뿐이었다. 아침 등굣길에 작은 감사를 느꼈을 뿐, 시간을 다투며 고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불합리한 현실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익숙해서 잊혀지기도 하는 밤의 소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따금 그 소리는 비명을 질러 귀를 잡아끈다. 파업이다. 숨죽여왔던 절규를 그제야 내뿜지만 우리는 시끄럽다며 불편을 호소한다. 얼마전 서울대 시설관리직의 파업이 그렇다. 누군가의 낮을 위해 밤에 일하는 이들의 성토는 익숙하게 외면된다. 파업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명문대생들의 ‘형설지공’을 노동자들이 막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형설지공은 뜻 그대로 반딧불과 눈 내린 밤의 쉬지 않는 빛으로 이룰 수 있다. 우리의 낮은 누군가의 밤에 빚지고 있다. 우리의 하루를 위해 밤의 노동자는 항시 존재한다. 깜깜하고 추워서 기피되고, 그 공로를 사회가 외면해 제대로 대우받지도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개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 시달린다. 5분마다 쌀 한 가마니 무게의 쓰레기를 짊어지면서도 최저임금을 받는 청소노동자가 그렇고, 남들이 퇴근한 후 일을 시작하는 시설관리직이 그렇다. 이들은 유령이 아니다. 실존한다. 이어폰을 끼고 방음벽을 설치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들어야 할 소리를 소음으로 취급하고 잠을 자듯 귀를 막는 시대다. 드르렁 코를 세차게 골고 돌아누워 잠을 이어가듯, 단발적인 분노를 내뿜고 또 소리를 잊는다. 서울대 시설관리직의 파업으로 학생들은 추위를 느껴야 했다. 사람들은 명문대생들의 공부 환경을 걱정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차별적 처우와 직업 환경을 염려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프리랜서, 아르바이트 등 일명 ‘프레카리아트’, 밤의 노동자는 소수를 제외하곤 모두의 일상에 관여한다. 대다수 노년의 직업이기도 하다. 2년 계약직을 늘리고 귀족노조 타파하고 정규직 줄여 평등을 도모하자던 지난 정부의 코미디처럼, 불합리한 노동 현실은 퍼져나가기 마련다. 어두운 밤의 현실을 성토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에 잠 못 들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의 낮과 밤은 이어져 있다. 모두에게 밤은 온다.

바쁜 현대인에게 잠은 꿈을 위해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아까운 시간이다. 그러나 꿈을 꾸느라 잠을 깨우는 소리마저 듣지 못하면 안 될 일이다. 한 신문사는 서울대 시설관리직이 행시, 로스쿨을 준비하는 미래 재원의 아까운 시간을 뺐었다며 호통을 쳤다. 그 시험들이 파업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시험을 통과하면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서울대 파업의 소리는 오히려 미래 공동체를 이끌 재원이 가장 가까이 듣고 배울 수 있는 소리일지 모른다. 모든 움직임에는 방향이 있듯이 모든 소리에는 의미가 있다. 마음을 편하게만 하는 백색소음이 아닌 복잡한 소리도 들어보자. 백색은 당신을 배제한다. 하지만 총천연의 소리는 잠 못 드는 당신의 이야기도 담아낼 것이다. 볼륨을 줄이기보다 대화를 시작한다면 거친 소리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음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숙면을 돕는 따스하고 사려 깊은 공존의 자장(磁場) 노래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