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 여성을 불러내다, 라비니아 / 어슐러 K. 르 귄
라비니아는 초기 로마 개척자의 조상인 아이네이아스의 아내다. 라티움의 왕 라티누스와 왕비 아마타의 딸로 투르누스 등 많은 이의 구애를 받았으나, 이방인인 아이네이아스를 선택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라비니아는 아주 짧게 등장한다. 그러나 아이네이아스는 라비니아의 이름을 따서 고대도시 ‘라비니움’을 건설했다. 어떤 여성이기에 아내의 이름을 따 도시국가의 이름을 지었을까. 어슐러 K. 르 귄은 쉽게 지나치기 마련인 라비니아의 시선에서 전쟁과 사랑, 신탁,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라비니아 지도
아이네이아스의 그림
중세나 고대, 신화 배경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순결한 사랑, 충심, 정의로 가득찬 세계관이 좋았다. 실리와 처세가 난무하는 세상의 판타지처럼 여겨졌다. 이입하는 대상은 영웅인 ‘남자’였다. 이런 성공 스토리에서 여성은 낭만적 대상이거나 보호해야 할 장애물(민폐 캐릭)이곤 했다. 이런 영웅 서사가 지겨워질 때쯤 수동적이기만 한 여성 캐릭터에도 지루함을 넘어 아쉬움을 느끼게 됐고, 언제부턴가 뻔하기만 한 히어로물은 잘 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 만난 어슐러 K. 르 귄의 이 책은 굉장히 신선했다. 특히나 남성들의 역사, 그야말로 History인 그리스로마 신화, 전쟁의 연대기를 여성의 관점에서 진취적으로 그려냈다. 주인공은 ‘라비니아’. 로마의 조상 격인 아이네이아스의 3번째 아내인 그녀는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는 잠깐 언급되고 만다. 하지만 작가는 그녀에 대한 얼마 없는 기록을 바탕으로 새로운 판타지를 기록해놨다.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 속에서 라비니아의 선택과 고민, 운명에 대해 촘촘히 유려하게 써내려가 읽는 동안 즐거웠다. 무대 밖의 여성을 개연성 있는 상상으로 채워나간 필력이 존경스럽다.
특히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소싯적 브래드 피트의 매력이 흠뻑 담긴 영화 <트로이>에 매료되었어서 그런지 더 흥미롭게 읽었다. 영화에도 잠깐 나오는 아이네아스의 아내의 이야기라니, 처음에는 조금 집중력이 떨어졌지만 초반의 낯섦을 극복하면 술술 읽힌다. 얼마전 넷플릭스의 드라마(BBC 합작) <트로이>가 너무 실망스러웠어서 더 만족스럽다. 역사와 신화를 찾아보니 영화나 드라마 모두 사실관계에 왜곡과 과장 축소가 있었던 반면 라비니아의 경우 기록이 원체 없다 보니 판타지에 기대 그릴 수밖에 없으므로 마음 편히 읽어나갈 수 있었다.
어슐러 르 귄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 초 타계한 그의 부고 기사를 읽고 그의 존재를 알았다. 판타지 문학에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페미니즘적인 SF판타지를 썼다는 그에 대한 설명에 꼭 어떤 책이라도 읽어봐야지 마음을 먹었었다. 사실 읽고 싶었던 책은 젠더 고정관념을 묻는 <어둠의 왼손>이나 아나키즘에 대해 다룬 <빼앗긴 자들>, 또는 인종차별을 담아낸 <어스시의 마법사>, 개인의 희생을 그린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현실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를 판타지로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 모든 책은 작은 동네도서관에 없었고, 유일하고 누렇게 바란 책 ‘라비니아’를 읽게 됐다. 결과적으론 시작이 좋았다. 이 정도 작가의 필력과 작은 것에 대한 관심이라면 신뢰가 간다.
<인상적이었던 부분>
그래도 그 단어들에서 나의 부분, 그러니까 그의 시에서 내게 부여된 삶은 내 머리카락에 불이 붙는 순간을 빼면 너무나 지루하고, 내 처녀 적 두 뺨이 진홍색 염료에 상아가 물드는 것처럼 붉어질 때를 빼면 너무나 색채 없고, 너무나 진부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만일 내가 100년이고 200년이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한다면, 최소한 한 번은 터트려서 이야기해야 한다.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시키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말을 가져와야 한다. 그는 나에게 길지만 시시한 삶을 부여했다. 나는 빈 자리가 필요하다, 공기가 필요하다. 내 영혼은 이탈리아의 해묵은 숲 속으로, 햇살 비추는 언덕들 위로, 백조와 진실을 이야기하는 까마귀들이 나는 바람 위로 뻗어 나간다. 내 어머니는 미쳤지만, 나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늙었지만, 나는 젊었다. 스파르타의 헬레네처럼, 나는 전쟁을 초래했다. 헬레네는 그녀를 원한 남자들이 그녀를 갖도록 내버려 둠으로써 전쟁을 초래했다. 나는 남에게 주어지거나 남이 갖도록 하지 않고 나의 남자와 내 운명을 택하려 했기에 전쟁을 초래했다. 그 남자는 유명했으나, 내 운명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쁜 균형은 아니다.(11)
나는 구애를 원하지 않았다. 시합과 소시지, 아이들, 새끼 되지들, 딱딱한 천사들을 원하지 않았다. 말수 적고 정숙한 처녀로서 연회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반면에 어머니 아마타 여왕은 정직한 사내들을 퇴짜 놓고 비웃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자매의 아들, 잘생기고 푸른 눈을 지닌 투르누스의 마음을 얻고자 애썼다. (58)
“나는 해야 맞는 일을 알고 싶어요, 하지만 그걸로 무슨 결과가 나올지는 알고 싶지 않아요.” (71)
우리 모두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적개심은 어리석고 옹졸하며, 분노조차 부적당하다. 나는 바다 표면에 하나의 빛나는 점일 뿐이며, 샛별에서 뻗어 나오는 어렴풋한 반짝임일 뿐이다. 나는 경외감 속에서 산다. 내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래도 나는 바람을 타는 말없는 날개, 알부네아 숲 속에 형체 없는 목소리이다. 나는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가라, 계속 가라.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