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역사 / 설혜심 _ 근대유럽에서의 소비의 시작 격이라고 볼 수 있는 사건들
'소비주의 사회'의 본질, 양면 등에 생각은 예전부터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필수'적인 파이를 넘어서서 정체성, 자존감을 확립하기도 하는 소비행위에 대해 깊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집어든 책이었다. 대개 '역사'를 말하는 건 근원을 쫓아 어떤 통찰을 주곤 하니까!
현대의 소비라는 것이 근대에 뿌리를 두어서일까. 생각보다 책에서 소개한 소비의 역사는 파편적이고 얄팍했다. 흥미로운 내용이 주욱 이어져서 단숨에 읽어내렸지만 딱히 새로운 깨달음을 건져내진 못했다. (물론 내 탓일 수도 있다.) 아주 가끔 요즘 시대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이 있지만 그마저도 짧고 물음표로 끝나는 부분이라 더 아쉬웠다.
덧붙여 대부분 근대 소비의 시작을 알린 영미권 시대상황을 표현한 부분이고, 설명으로 그쳐 있어 지금 우리 시대, 우리의 장소와의 연결이 직관적으로 되지 않았다. 조금만 친절하게 글의 서두나 리드만이라도 우리 사회상을 짚어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라이프 면의 '소비 섹션' 기사 모음 같은 인상이라, 그냥 킬링타임용으로 생각하면 만족도가 더 높을 것 같다.
+ 이 책은 페미니즘 책도 아니고 여성사에 대한 책도 아니지만 소비사회에서 억압받은 여성에 대해서도 다루는데 그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고 뼈아프게 다가왔다. '역사'라는 것은 어쩌면 '차별의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REMINDER
- 근대 소비사회는 여성을 남성이 생산하는 물건에 대한 '의례적 소비자Ceremonial Consumer'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그(베블런)의 주장이다. 이제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부유한 남성의 부인으로서 '과시적'으로 소비해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계층을 구별 짓는 행위가 되었다는 말이다. (52)
- 광고인들이 지나칠 만큼 성을 많이 이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광고비란 어차피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돈이므로 약간의 재미를 첨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동차나 술처럼 남성을 주 소비자로 상정해온 상품의 광고에 섹시한 여성을 등장시키는 것은 이제 광고계의 전통 아닌 전통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남성을 구매자이자 소비자로, 여성은 상품과 동일시된, '소비 대상'으로 객체화한다. (105)
: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30대 여성이 주요 문화소비층이지만 이들을 타깃으로 한 광고에는 헐벗은 여성이 등장하곤 한다. 예능드라마의 TV시청자의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남탕 예능에 드라마의 멋있는 역할은 거진 남자 롤이다. 제작자가 대개 남성인 탓, 남성 위주의 문화 소비에 익숙해진 탓이 클 테다.
최근 유호진 PD의 새 예능 론칭 기사를 봤는데 무슨 탐험대 콘셉트이던데 죄다 남자더라. 그 사실만으로 별로 보고 싶지가 않아졌다. 탐험은 여자는 힘들 거라는 편견이 느껴졌다. 만약 그렇더라도 그 힘듦까지 같이 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좋지 않을까.
- 흥미로운 것은 돌팔이 의사의 화법이었다. 정식 의사가 환자와 대화를 통해 병을 진단하는 쌍방향 소통을 한다면, 돌팔이 의사의 화법은 일방적인 연설에 가까웠다. 몰려든 낯선 사람들을 모두 환자라고 가정하고 마구 뱉어내는 식이었다. 돌팔이 의사들은 일단 정식 의사들이 제대로 병을 고치지 못한 사례들을 마구 늘어놓으며 정통의학계를 비판한 뒤 자기가 개발한 제품이 그런 한계를 극복하는 특효약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의학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세일즈맨의 제품 설명이나 광고 문구에 가까운 내용으로, 같은 내용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언급했다. 사람들은 그 연설에 빨려들어 홀린 듯이 약을 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자면 환자 개개인의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이런 화법이 먹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화법은 매우 효과적인 설득 방식이었다. 모든 말이 '무조건 낫는다'로 귀결되는, 오직 치료라는 사실에만 집중된 강력한 선전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111)
: 이 반복 연설이라는 게 사실 굉장히 무서울 정도로 효과가 크다. 그래서 듣기 싫은 말은 알아서 피해야 한다. 세뇌라는 것은 의지를 넘어서기 때문에.
- 재봉틀은 세상에 선보일 당시 최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자랑하는 상품이었다. 이 상품에 대한 반대는 크게 고용 문제와 의학 담론 두 영역에서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첨단의 테크놀로지 기기들에 대한 반대 담론은 흔히 이 두 주제로 전개되곤 한다. 예를 들자면, 첨단의 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된 계산대 없는 식료품 상점 '아마존 고'처럼 식품매장에서조차 인간이 일자리를 인공지능에 빼앗기게 될 거라는 우려는 고용 문제에 속한다. 한편, 스마트폰이 비염으로부터 뇌종양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는 의학 담론의 문제 제기다.
그런데 재봉틀에 대한 반대 담론의 기저에는 본질적으로 성차별적 편견이 깔려 있었고, 그것이 해소되고 교정되면서 점차 재봉틀 자체에 대한 반대가 자연스럽게 극복되었다. 하지만 과연 인공지능에 대한 반대의 기저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 이것이 불분명하다는 점 때문에, 즉 우리에게 아직 학습효과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첨단 테크놀로지 제품을 반대하는 문제는 더욱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37)
: 재봉틀의 페달을 밟는 게 여성의 성욕을 부추겨 외도할 수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여성이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했다는 것도. 지금은 바느질은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참... 인공지능 반대 기저의 심리에 대해서는 궁금한 부분이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위해성 등은 차별의도가 없다는 점에서 비교할 부분은 아니지 않을까.
- 아버클 브라더스 커피 회사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많은 기업이 세계 곳곳을 지도와 함께 그려낸 트레이드 카드를 선택했다. 세계의 지리, 풍속, 역사를 개관하는 카드는 방대한 내용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시리즈로 만들기에 알맞았다. 또한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다양하고 신기한 정보를 담은 이런 트레이드 카드가 마치 백과사전의 축소판 같아서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교육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렇게 트레이드 카드에 세상을 담아내는 기획은 사실 묘사의 대상이 되는 나라와 사람들을 서구의 시선에서 관찰하고, 묘사하고, 나열하는 행위였다. 트레이드 카드는 중립적으로 보이는 상품을 홍보하면서 그 이면에는 지극히 서구 중심적인 인종지학을 실어 날랐던 것이다. (164)
: 짧게 함축하는 것, 특히나 이미지로 함축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식으로든 스테레오타입화됨으로써 편견이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 백화점 관계자에게 왜 노인 전문관이 없느냐고 문의했더니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왔다. 우선, 노비은 자신이 노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심리가 강하기 때문에 노인 전용 상품관을 만들어봤자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다른 대답은 좀 더 흥미로운데, 주로 의류 쇼핑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부터 구입해온 브랜드의 옷을 계속 입기 때문에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굳이 노인용 전문 브랜드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다. 40대 후반이 되어서도 어릴 적 입던 영 캐주얼 브랜드를 계속 입으려 하고, 70대 할머니도 오랫동안 단골로 다닌 '여성 정장' 섹션의 브랜드에 지속적인 충성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브랜드는 고객과 함께 늙어가는 셈이다. (256)
- 쇼핑은 어느 연령층에게나 여가활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지만 특히 노년층에게는 매우 중요한 여가활동이자 사회활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년층은 식료품을 제외하고는 시내 중심가나 백화점까지 나들이를 나가서 쇼핑을 한다. 이러한 습관은 그들이 젊은 시절에 해왔던 관행을 지속하겠다는 의지의 한 단면일 뿐 아니라, 쇼핑을 통해 도심이나 백화점을 방문하여 친구를 만나거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는 등 사회활동을 해나간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261)
: 진심 공감하는 부분이다. 영 캐주얼이라고 하는 브랜드에서 환갑이 가까운 우리 엄마도 잘 사 입는다. 50대 교수님께 중년이라고 했다 핀잔을 들은 적도 있다. '실버' 뭐뭐를 만들면서 그들을 묵는 시도는 그래서 실패하기 쉬운 것 같다. 요금 혜택과 같은 게 아니라면. 문화 소비층으로 묵는 건 말이다. 이래서 무엇을 팔듯 '젊음'을 팔아야 하는 것 같다.
- 미시시피의 흑인들에게는 월마트가 다른 의미에서 각별한 곳이었다. 도심의 가게에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고객님 환영합니다" 같은 환대를 처음으로 누려본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흑인들이 흑인 전용 뒷문으로 출입하지 않아도 되었고, 계산대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교육받은 점원들의 '영혼 없는 친절함'마저도 백인과 흑인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상점에서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407)
: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자본주의의 첨병인 대형마트가 흑백차별을 해갈하는 방식으로도 쓰이다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영혼 없는 친절함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돈이건 인종이건 차별은 나쁘기 때문에. 그리고 이래서 사람들은 돈을 믿고 싶어하는 것 같다. 어쨌든 주머니에 든 대로 대우하니까. 또, 그렇다 보니 돈이 사람을 차별할 때 더 서러운 거 같다. '돈'이라는 것의 적법성, 합리성에 대해 너무 맹신하다 보니 볼멘소리 하는 것도 비참해지니까.
TMI
- 17~18c 영국인들의 유언검인목록을 보면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재산으로 어떤 것을 남겼는지 볼 수 있다.
: 고인의 생전 옷을 태워버리는 우리네와는 달리 영미권에서는 제일 친한 친구 등에게 드레스를 남긴다는 게 신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한 번도 입지 않은 비싸고 좋은 옷이 꽤 있었으나 작은 아버지는 받을 생각이 없다고 하셨었다. 결국 아름다운가게에 다 기부했고, 또 어떤 옷들은 태우기도 했는데... 우리랑은 꽤 다른 문화다.
- 유럽식의 위생 개념이 나타난 것은 19세기가 한참 지나서였는데 영국에서는 19세기 초 '사회적 순결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하층민의 도덕과 성생활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으로 "사랑을 잃는 만큼 제국을 얻는다"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 인터넷에서 한국인의 위생 개념이 뛰어나다는 글을 보곤 하는데, 이 청결의 역사에 대해서도 한번 책을 읽어보고 싶다.
- 19세기 중엽 압도적인 시장 장악령을 보여준 재봉틀 회사는 싱어사였다. 싱어사는 박음질 기법 등 특허를 통합해가며 대량 생산에 돌입하게 된다. 이후 진공청소기나 자동차같이 비싸고 복잡한 기계가 가정의 소비재가 되기 시작했다.
: 재봉틀이 대량생산 기계의 시초 격이란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의식주' 중에 항상 왜 '의'가 들어 있나 의아할 때가 있었는데, '의'는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고 표현을 욕망하는 존재로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 1997년 에이본사는 바비인형으로 유명한 마텔Mattel사와 협업을 시작해 최초의 에이본 레이디였던 알비를 모델로 한 '알비 바비인형'을 내놓았다. 이후 다양한 인종, 다양한 시대의 유니폼을 입은 에이본 레이디 시리즈가 꾸준히 출시되고 있다.
: 우리나라로 치면 다단계 여성이라고 보면 될까, 그 유니폼을 입은 인형 시리즈라니 그걸 또 방판 할 때마다 팔아먹을 생각을 하다니 대단하다.
- 사회의 상층부에서 하층으로 부나 유행이 흘러내려오는 현상을 말하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은 게오르그 짐멜이 한 말이다.
- 근대 유럽에서 발간된 의학서는 출산을 전제로 한 성생활 지침서였지만, 동시에 '피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안내서 노릇을 했다.
: 근대 유럽에선 출산을 위한 성생활만을 합당하다 생각했다는데 출산을 위한 엄격한 성생활 지침서를 반면교사 삼아 더욱 열심히 피임하면서 성생활을 했다는 부분... 이런 전복이 다 있나 ㅋㅋ
- 19세기 유럽 의사들은 생리, 임신, 갱년기처럼 여성의 신체적 특질이 도벽을 불러일으키는 '자가중독auto-toxic'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 19세기 말 독일에서 귀 축소 수술이 시행된 이유는 당시 유대인의 귀에 대한 편견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살집이 두둑한 귓불과 크고 불그스레한 귀는 '돌출귀'라는 별명을 얻었다.
: 이 부분에서도 문화권이 상이함을 느꼈다. 우리나라는 보통 부처님 귀라며 복귀라고 하는 귀를 성형까지 했구나 싶어서
- 바스에는 킹스 바스, 퀸스 바스, 크로스 바스, 핫 바스 같은 공중 온천탕을 비롯해 나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나환자 탕 등 다양한 욕탕시설이 있었으며, 신분에 따라 입장료가 달랐다.
- 영국이 노예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18세기 전반부터 퀘이커 교도 등 종교집단들이 앞장서서 노예무역을 반대했다.
- '분리평등' 원칙을 내세워 흑백차별을 조장해온 백인들은 심지어 음수대조차 백인과 유색인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도록 했다. 흑인들은 상품을 구매할 때에도 흑인 전용 출입문만 이용해야 했고, 백인들 뒤로 순서가 밀리곤 하는 차별을 받았다.